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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호의 당구 이야기 ②] 한국 당구, 마침내 일본을 제치다
© 2007년 수월월드컵에서 입상자들과 심판위원들이 기념찰영을 하고 있다. / 스포츠서울
[스포츠서울] 1964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직제 개편이 있었다. 이때 보사부 환경위생협회가 해체 되면서 당구협회가 인가를 받았고 이준구 씨가 회장에 추대 되었다.
이듬해인 1965년 대한당구협회 주최 전국당구선수권대회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는데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2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해 박수복이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명실상부한 전국대회로, 초청된 재일동포 윤춘식이 세리 시범을 보이고 박수복, 조동성과 시범경기를 펼치는 등 한국당구 경기력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다. 사구 경기 때 세리 기법을 처음 보게 된 한국선수들은 윤춘식의 세리 기법에 충격을 받아 이후 너나없이 세리를 연습해 사구 경기력이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되었다.
1966년 제 3회 전국당구대회는 최언보가, 시민당구장에서 열린 1969년 제 4회 대회에서는 ‘이리꼬마’가 애칭인 전광운이 우승을 한다. 1970년 동심당구장에서 개최된 제4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 사구경기에서 조성철이 우승했고 1971년 동심당구장에서 개최된 제5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 사구1000점 조에서 전광운이 우승을, 인천출신 서민이 준우승을 차지한다.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당구 종목은 일반 대중들이 진입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1966년 서울의 당구장 수는 약 2000여 개에 달할 만큼 절정의 호황기를 맞이했다. 큐, 초크, 라사 등 당구 용품의 품질과 함께 경기력도 향상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준구 회장의 초청으로 일본의 히도 선수가 방한 해 협회 당구장에서 조동성, 박수복과 시범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당시 한국 당구는 일본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기량이 발전했는데 이런 흐름은 1980년까지 이어지면서 일본 선수들을 ‘당구의 신’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경기스타일도 수비와 공격을 겸비한 일본식 전략이 전부였다.
당구 경기에 절대적인 용품인 당구공의 변천은 상아로 만든 공으로 대회를 치렀던 UMB(세계당구협회)가 수지로 제작된 공을 공인구로 지정한 1969년부터이다. 상아 공은 일정하지 않은 무게, 지름의 차이 등 문제점과 함께 너무 무겁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오일)에 묻어 두지 않으면 표면에 금이 가는 등 관리도 너무 어려웠다.
당구 공이 수지(프라스틱)로 바뀌면서 경기력은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다. 상아 공은 신촌에서 당구 재료상을 운영했던 김태수 당구인이 2벌을 소장하고 있는 정도로 이제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2012년 유니버셜 코리아가 주최한 아담컵 한일전 당구대회 전경.
이준구 회장의 사임으로 이항구 씨가 대한당구협회 새 회장에 추대되면서 한국 당구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972년 5월 성림당구장에서 개최된 제1회 한일친선당구대회 단체전에서 한국이 22승 20패 7무로 승리하게 된다. 한일친선당구대회는 10회까지 이어지며 이 대회를 계기로 ‘국가대표’ 타이틀이 선수들에게 쓰이기 시작했고,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많은 선수들이 몰려들면서 당구 붐 조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사용한 공은 사기 공이었다. 재일동포로 일본당구협회 전무이사였던 윤춘식이 벨기에 공을 들여오면서 국내서도 벨기에 공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무렵이 1973년도이다. 하지만 당시 들여온 65.5mm 공은 결과적으로 한국당구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모든 당구대가 65.5mm 공에 맞춰 쿠션이 만들어지면서 여성들이 이 공을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시 당구를 즐기는 다른 나라들은 61.5mm 공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큰 공을 사용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보다 당구가 앞서 있었던 유럽의 여러 나라 어린 선수들은 61.5mm 공으로 당구를 치다가 성장해서 대대를 접해도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국내 선수들을 중대(국내식 당구대)에서 큰 공을 치다가 대대에 입문하게 되면 당구를 다시 배워야 하는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1973년에 개최된 제2회 전국당구대회 사구에서 이강수가, 3쿠션 A조는 박용인, B조에서 정상철이 우승을 하게 된다. 1974년 제3회 한일친선당구대회가 무교당구장에서 개최됐는데 전광운이 GA(그라운드 에버리지) 154.9로 우승을, 박병문이 GA 80.60으로 준우승을 하면서 ‘이리꼬마’ 전광운과 박병문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제4회 한일 친선3쿠션 당구대회가 성림 당구장에서 개최됐다. 이 대회에서 한국의 한상화 선수가 GA 0.838로 우승, 김용이 0.751로 준우승을 하면서 한국이 대승을 거두는데 이때 3쿠션은 일본과 해 볼만 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또 이항구 회장이 취임 후 첫 사업으로 성림당구장에서 개최한 제1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에서 전 대회에 이어 한상화가 우승을 차지했고, 1975년 제5회 한일당구대회가 허리우드 당구장에서 열리는 등 전국규모 대회가 러시를 이루면서 한국 당구가 한 단계 발전한 시기였다.
2011년 한국당구 그랑프리 전국3쿠션 당구대회에서 최성원 선수가 경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항구 회장이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이어서 광교에서 당구장을 경영하던 박성오 씨가 대한당구협회 회장으로 당선된다.
박성오 회장은 취임 후 첫 사업으로 한일당구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정상철이 GA(그라운드에버러지)1.250으로 우승, 양귀문이 GA 0.950으로 준우승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국 당구의 대약진이었다. 3쿠션에서 우승과 준우승을 모두 내준 일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1976년에는 대한당구협회 주최 제11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가 허리우드 당구장에서 열려 부산 출신인 신예 정상철이 우승을 한다. 1976년까지 한국 당구는 세계 당구협회에 등록조차 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로 일본 당구에 끌려 다니는 모양새였지만 박성오 회장 재임 중 UMB (세계당구협회)에 가맹 신청을 하면서 세계 당구의 블록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1978년에는 제6회 한일친선당구대회가 신진당구장에서 개최돼 한국이 22승 12패 1무로 일본을 이겼다. 부산 출신 정상철이 준우승을 하면서 한국당구의 일인자로 자리매김 하게 된 대회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1978년, 제12회 전국당구대회가 청운당구장에서 열려 사구 조에서 백정기가 우승했고 1979년 3월에 개최된 대한당구협회 주최 제13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에서는 A조에서 김철민이, B조에서는 장성출이 우승을 한다.
UMB에 가맹한 한국 당구는 1979년 1월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권을 획득해야 하는 아시아 선발전에 출전할 국가대표를 선발했다. 유신당구장에서 열린 선발전에서 이상천이 국가대표로 뽑혀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게 된다. 일본 선수 8명과 한국 선수 1명 등 총 9명이 리그전을 통해 2명을 아시아 대표로 선발하는 경기방식이었다. ACBC(아시아케롬당구연맹) 회장국인 일본은 한국선수를 대표로 보내지 않기 위해 리그전으로 경기 방식을 정했는데, 리그전의 특성상 세계대회 출전권 획득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결국 이상천은 선전했지만 5위에 만족해야 했다.
1980년 10월 동경에서 개최된 세계3쿠션선수권에는 한국대표로 박병문이 출전했지만 본선 선발전에 역시 7위로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박태호 당구연맹 수석 부회장> news@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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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 스포츠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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